건물의 당호(堂號) 학산재(鶴山齋)는 건축주의 별서(別墅)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대학에서 역사 교수로 재직하셨던 건축주는 고서를 비롯한 책을 보관하기 위한 별도의 공간으로 강릉 외곽의 학산리에 위치한 시골집을 월세로 얻으셨다. 마당에 텃밭을 갖춘 빨간 양철지붕의 전형적인 강원도 농가 주택이었다. 우연히도 건축주의 고향 뒷산 이름도 비학산이었기에 지명을 본따서 당호를 학산재라 하였다. 빨간 양철지붕집 학산재는 주말이면 고추와 상추 몇 포기를 심고 가꾸는 주말농장이 되었고, 책이나 논문을 쓰는 집필실의 역할을 다하였다. 대관령에서 이어져 내려온 산길과 눈앞에 펼쳐진 들판은 사색을 할 수 있는 산책길이 되었다. 학산재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타지인 강릉에서 자리를 잡으시는 과정 중 가장 큰 위로의 장소였다. 이처럼 소박하지만 깊은 정이 든 이 집은 이후 건물의 이름과 디자인 요소의 모티브가 되었다
건물을 짓게 된 계기는 퇴임을 하면서 보관할 장소가 없어진 책들이었다. 역사 교수에게 책은 자산이며, 자식과 같은 존재였다. 그렇게 우리에게 만 권의 책을 보관할 수 있는 도서관과 퇴임 후 집필 및 강의를 할 수 있는 사무실, 곧 서재를 짓고 싶다는 의뢰가 들어왔다. 건축 계획 중 프로젝트는 책을 위한 공간에서 사람을 위한 공간으로 확대되었다. 강릉이 살기도 좋지만 놀러 오기에는 더 좋은 곳인 탓일까, 사람을 좋아하는 건축주 내외분에게는 타지에서 방문하는 손님들이 많았다. 강릉에서 순두부도 먹고 회도 먹다 보면 손님들의 여행 일정은 당일로 끝나지 않았다. 자식들도 곧 결혼을 해서 어느 순간 인원이 늘어나 있을 터였다. 그래서 이왕 건물을 짓기로 한 것을 두 동으로 늘려 한 동은 손님도, 멀리 사는 가족도, 여행객들도 묵게 해야겠다고 결심하셨다. 그렇게 소소하게 한 동으로 시작한 프로젝트는 금새 판이 커져 버렸다.
대지는 산을 깎아 계단식으로 개발한 택지지구의 한 필지였다. 두 면은 높은 옹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동쪽과 남쪽으로는 대관령의 줄기인 칠봉산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여기에 두 동의 건물을 어떻게 배치해야 할까. 건물의 배치에 따라 어떤 성격의 마당이 만들어질지가 결정될 터였다. 이미 정원을 가꿀 생각으로 두꺼운 가드닝 책 두 권을 독파한 아내분에게 마당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낼 공간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여러 안 중 대지의 가장자리로 건물을 배치한 안이 결정되었다. 두 면은 옹벽, 두 면은 건물에 둘러싸여 주변의 시선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아늑한 안마당이 만들어졌다. 이러면 텃밭과 정원을 가꾸면서 땀범벅이 되어도 마음 놓고 작업을 하실 수 있을 것이다. 마당은 중앙부를 비워두고 흙바닥 그대로 두었다. 이미 주변의 산세와 풍경이 좋았기에 마당까지 채우려고 하지 않았다. 조경은 높은 옹벽의 위화감을 줄일 수 있도록 옹벽과 건물 주변부로만 식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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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의 시작 단계부터 자연스럽게 사무동은 남편분과, 숙박동은 아내분과 협의를 진행하였다. 그렇게 서재와 집필 공간이 있는 동은 사랑채, 숙박으로 쓰이는 동은 안채로 불리기 시작했다. 두 동은 의도적으로 연결 통로를 만들지 않았다. 사랑채와 안채를 분리하는 한옥과 같이 거주자의 상호 존중과 프라이버시 존중을 위해서이다. 그리고 해가 강하면 강한대로, 비가 오면 오는대로 건물을 나와서 자연을 접하고 다시 다른 건물로 들어가는 여유로움을 가지시길 바랐다. 사랑채는 만 권의 책이 설계의 주인공이었다. 1층 서재는 강한 햇빛으로 인한 책의 손상을 염려해 마당을 바라볼 수 있는 북쪽과 천창으로만 창을 냈다. 책이 가득 들어차도 개방감을 유지하기 위해 높은 층고로 계획하였으며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좌석을 놓았다. 창이 없고 층고가 높은 건물의 남쪽 면이 바깥 도로에서 보았을 때 위압감을 주지 않도록 전면에 자작나무를 심었다. 대지 내에서 뷰가 가장 좋은 2층 사무실은 모서리를 터서 동쪽과 남쪽의 산세를 보며 집필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안채에는 마음껏 바람을 맞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하셨다. 그리하여 주방 및 거실과 침실 공간 사이에 한옥의 대청마루와 같은 공간을 만들었다. 동쪽으로 산세가 좋아 크게 창을 내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담장이 없고 주변으로 모두 개방되어 있는 위치 때문에 실내가 쉽게 들여다보이는 문제가 있었다. 대신 대청쪽으로 공간을 오픈하여 대청을 통해 바람과 햇빛을 들였다. 그리고 산을 마주하는 안채의 동쪽면에 길게 툇마루를 놓았다. 대청에는 여름날 뿐만 아니라 겨울에도 사용이 가능하도록 앞뒤로 전면 개방이 가능한 유리 폴딩도어를 설치했다. 그리고 골바람이 강한 봄날에 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붉은 철제 덧문을 달았다. 여름에는 폴딩도어를 열어젖혀 바람을 맞으며 멋진 낮잠을 잘 수도 있고, 날이 추워지면 도어를 닫고 전면으로는 산세, 후면으로는 마당의 조경을 바라보며 군고구마와 따뜻한 차 한 잔을 할 수 있는 공간을 기대했다.
학산리의 집을 떠올릴 수 있는 붉은 골강판과 공간적 요소들을 적용하여 신축이지만 어딘가 익숙한 건물이 되었으면 했다. 학산재가 퇴임 후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하시는 건축주 부부의 따뜻한 보금자리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